퇴사 부검 : 네이버를 떠나며

12년 넘게 다닌 회사를 떠난다. 군대를 전역한 이후, 스스로의 선택으로 회사를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첫 출근 날의 설렘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데, 어느새 마지막 퇴근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쉬움과 후련함, 설렘과 두려움이 번갈아 찾아온다. 감정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긴 시간의 무게가 마음 한편에 조용히 가라앉는다.
눈을 감고 천천히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본다. 신입사원이던 시절, 세상이 내 손안에 있는 듯한 자신감이 있었다. 첫 업무가 웹페이지 하단의 사명을 NHN에서 NAVER로 바꾸는 일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엽고 소박했다. 동료들과 웃고 떠들던 점심시간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안고 보냈던 수많은 야근의 밤도 생생하다. 물론 그 반짝이는 순간들 사이엔 힘들고 외로운 날도 있었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막막했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을 사랑했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이제는 떠나지만, 이 회사는 내 안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이 글은 단지 퇴사의 기록이 아니다. 나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자, 커리어의 전환점에 대한 고백이다.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지. 나는 지금 그 질문들 앞에 서 있다. 이 글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천천히, 한 줄 한 줄 정리해보려 한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언젠가의 나에게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기를 바란다.
넷플릭스에서는 직원이 퇴사하기 전에 ‘퇴사부검’이라는 메일을 보낸다고 한다. 그 메일에는 아래의 내용이 담긴다.
- 왜 떠나는지 : 다른 직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
- 회사에서 배운 것 : 새로 배운 것과 경험한 것
- 회사에 아쉬운 점 : 회사가 이랬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
- 앞으로의 계획 : 어느 직장에서 어떤 업무를 할지
- 회사의 메세지 : 직원을 떠나보내는 회사의 입장
이 형식을 따라, 건강한 퇴사를 위한 기록을 남기려 한다. 다만 5번 항목은 내가 이야기할 부분이 아니기에 생략한다. 대신 시작에 앞서 네이버라는 회사에 대한 생각을 짧게 정리하고 시작한다.
부검 0 : 네이버에 대하여
네이버는 대한민국 최대의 검색 엔진이자 포털 사이트다. 개발자이자 직원으로서도 다니기에 좋은 회사로 유명하다. 나 역시 재직 기간 동안 수많은 복지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라 복잡한 도메인 설계부터 대규모 트래픽을 다룰 기회도 많았다. 개발자인 내게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출처 : https://design.co.kr/article/33592
네이버에는 서비스마다 다양한 조직이 존재한다. 직원 스스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는 OCC(Open Career Chance)라는 사내 제도도 있다. 물론 최근 들어 합격의 기준이 까다로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직원들이 네이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네이버엔 “최복동(최고의 복지는 동료)”이라는 말이 있다. 유연하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 배우고 성장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혀 있다. 이런 동료들과 함께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개발 역량을 키우고 기술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도 좋은 환경이다. ‘책임근무제’를 통해 개인이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도 네이버의 매력이다. 이토록 좋은 회사에서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결국 떠나기로 했다. 회사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왜 떠나기로 했는지,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천천히, 솔직하게.
부검 1 : 왜 떠나는가
12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경험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서비스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고 팀을 옮기기도 했다. 때로는 더 큰 도전을 위해 스스로 OCC를 통해 이동했다. 회사의 경영적 이슈나 조직 개편으로 인해 원치 않는 팀 이동을 겪기도 했다. 잦은 변화 속에 이직을 고민할 겨를조차 없었다. 매 순간 긴장과 도전의 연속이었고, 회사 자체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내 선택지에 ‘이직’이란 단어는 없었다.
어느덧 내 이름 앞에 ‘시니어 개발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회사의 기대와 시대의 변화, 내 안의 성장에 대한 갈증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주도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팀 내에서 나만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싶었다. 내가 개발하는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정말 의미 있는지, 내 코드 한 줄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민하는 시간도 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 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한 채 “해야만 하는 일"이 많았다. 회사의 방향과 내 가치관이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스스로 지키고 싶었던 개발자로서의 기준이 점점 흐려지는 것도 느꼈다. 가장 싫어했던 “바쁘니까 다음에 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내 입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서비스를 책임지는 개발자임에도, 점점 모니터링과 알림에 무감각해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해?”, “그게 지금 중요해?” 라는 식의 시선이 돌아오기도 했다. 예컨대, 테스트 코드를 작성하는 기본적인 부분이나, 지금 오류가 안나니까 다음에 보자 라는 의사결정이나, 서비스 스펙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히스토리가 힘이 되는 문화나, 기능개발이 끝나고 출시한 뒤 운영이나 개선에는 관심이 떨어지거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책임감과 기준이, 회사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질 때 마음이 무거웠다.

출처 : chatGPT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치 큰 공장에서 없어도 되는 작은 부속 나사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 스스로를 더 작은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리더와도 여러번 1on1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전달하며 방안을 찾아봤다. 돌아오는건 “어쩔수 없다” 라는 내용과 모호한 피드백들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팀을 변경하면 해결될까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더 큰 변화를 주고 싶었다. 꺼져가는 열정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 싶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친한 동료 그리고 멘토님과 긴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쉽지 않은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퇴사를 못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 중요한 선택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부검 2 : 회사에서 배운 것들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회색거위를 이용한 실험으로 ‘각인’이라는 현상을 발견했다. 어미 거위 대신 자신을 가장 먼저 보게 한 뒤, 부화한 새끼 거위들이 로렌츠를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녔던 이야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부화한 새끼 거위 같던 내게 네이버는 세상의 전부였고, 내게 깊게 각인된 존재였다.
주니어 시절, 선배 개발자들의 애정 어린 잔소리와 꼼꼼한 가르침 덕분에 ‘집요함’을 배웠다. 하나의 문제라도 쉽게 넘기지 않고 끝까지 파고드는 습관이 만들어졌다. 특히 대국민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용자들이 내 코드를 통해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사실 때문에 ‘책임감’도 자연스럽게 커져 갔다.
지금은 종료된 “쥬니버” 서비스에서 ‘동물농장 게임’의 돈 복사 버그를 악용하는 사용자를 잡으려고 IP 추적부터 PHP로 된 레거시 코드를 샅샅이 분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의 경험은 나에게 문제 해결 능력과 집요함을 심어주었다. 카드 결제 시스템(Payment Gateway)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직접 내재화하는 TF에 참여해, 말 그대로 맨땅에서 서비스 오픈까지 풀 사이클을 경험했던 일도 강렬한 성장의 순간이었다. 당시의 경험은 내가 얼마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깨닫게 했다.

출처: 그 당시 더쿠, 트위터
“VLIVE”(지금의 위버스) 서비스를 맡았을 때는 알림 발송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지구 반대편 팬에게 ‘우리 오빠’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작은 변화가 사용자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생활과 가장 밀접했던 “날씨” 서비스에서는 기존 기상청과 CP사에서 받은 데이터를 단순 노출하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 날씨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수신받는 새로운 구조로 확장하고 개선했다.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문제 해결사로 성장했다. 백엔드 개발자였지만 사내 해커톤에서 지도 기반 날씨 서비스를 직접 프로토타이핑했고, 그 결과물이 실제 서비스에 적용되는 모습을 보며 ‘내 자식이 이렇게 컸구나’ 하는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쇼핑” 서비스를 담당했을 때는 레거시 환경에서 쏟아지는 복잡한 요구사항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개발 컨벤션을 정의하고,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여 서비스 안정화에 기여했다.

초기엔 반복문과 제어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에 관심을 두던 주니어 개발자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서비스의 방향성과 가치를 고민하고, 여러 이해관계자와 협업하면서 조직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신입사원과 팀 내 주니어 개발자들을 멘토링하며, 단순히 기술적인 조언뿐 아니라 개발자로서의 기준과 방향성, 서비스의 본질과 가치를 함께 고민했다. 이런 경험 덕분에 나는 더욱 성숙한 개발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때 내 이력서의 타이틀이 “Software Engineer Crazy for Growth"일 정도로 성장에 몰두했던 시절이 있었다. 친한 동료의 권유로 글쓰기의 중요성과 재미를 깨닫고, 꾸준히 글을 써서 회사 안팎으로 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다양한 발표와 기고,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었고, 우물 안의 개구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간의 경험들을 다양한 채널에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지금의 개인 블로그부터 네이버 공식 블로그, 네이버 Hello World, DEVIEW CAMPUS, 요즘 IT, 교보문고 readIT zine 와 사내 공식 기술공유 채널까지. 함께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공유했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많이 성장한 건 나 자신이었다.
개발 기술 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용자가 얻는 가치라는 점이다. 빠른 출시(TTM, Time To Market)는 중요하지만, 사용자에게 충분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면 과감히 일정을 미룰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도 필요했다. 사용자의 경험(User Experience)이라는 관점에서 명확하게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팀워크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개인의 아집보다는 팀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관적 의견보다 데이터와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적 사고를 하고, 건설적으로 논의를 이끌어야 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서로 존중하며 긍정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깊이 깨달았다.
이 모든 경험과 배움이 12년이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든 것 같다. 이젠 더 큰 성장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지만, 네이버에서 배운 것들은 내 안에서 변치 않을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검 3 : 아쉬움과 회고
회사의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빠르다. 서비스를 빠르게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Time To Market’의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때로는 실무자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정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회사엔 ‘빨리하면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물론 빠른 일 처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일정만 좇다 보면, 출시 이후의 유지보수나 확장성, 안정성과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뒤로 밀리게 된다. 늘 급한 불을 끄는 데만 집중했고, 불을 끄느라 다른 문제들을 보지 못했다. 정말 급한 일인지, 급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인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만 처리하는 데 급급했고, 경주마가 차안대를 쓰듯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이런 환경 속에선 구성원 모두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코드 리뷰나 회의 같은 논의 자리에서도, 건설적인 대화 대신 긴장된 침묵만 흐르곤 했다. 여유가 사라지고 스트레스는 일상이 됐다. 일정을 변경할 수 없다면, 최소한 초기 단계에서 이해관계자들이 충분히 소통하고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개발자도, 서비스도, 회사도 모두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물론 덕분에 야근 근육이 탄탄해졌으니, 다음 회사에서의 딥다이브는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목표와 피드백이 정량적이지 못했던 점도 아쉽다.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인해 서로 오해가 생기고 불필요한 자원이 낭비됐다. 회사가 가고자 하는 방향, 조직과 팀의 목표, 그리고 개인의 역할까지 명확하고 투명하게 정의하고 지속적으로 점검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하자’는 모호한 표현 대신, 수치나 명확한 기준을 통해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움직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회고와 피드백 역시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하고 있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피드백이 더 필요했다.
회사는 학교나 학원이 아니므로 개인의 성장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 ‘일만 하는 팀’이 되어버린 점은 아쉽다. 기술 부채가 쌓이면 결국 회사 전체에 악영향이 가지만, 이를 개선하자고 말하면 “말 꺼낸 사람이 개선하라”거나, “눈치 없이 기술 부채 이야기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비즈니스 목표 달성이 우선이다. 하지만 개발자로서의 본분과 책임을 생각하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라도 기술 부채와 시스템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작은 개선이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마치 누군가 죄를 지은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던 것도 불편한 경험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담당 영역 이외의 문제에는 관심이 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IDC에서 생쥐가 전원 케이블을 갉아먹는 사소한 이유로도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장애 발생 원인을 따지는 것만큼이나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방지책을 명확히 수립하고, 이를 빠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휴먼 에러라면 이를 시스템 차원에서 빠르게 감지하고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마지막으로 ‘책임감’에 대해 짚지 않을 수 없다. 장애가 발생하면 민감하게 대응하고 복구하는 사람이 항상 제한적이었다.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일이 특정인의 역할로 굳어졌고, 결국 다른 사람들은 장애 대응법을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장애 대응자는 점점 피로가 쌓이고, 대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더욱 대응법을 모르게 됐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결국 장애 대응 담당자가 부재할 경우 아무도 대응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갈 수 있다. 모든 팀원이 정기적으로 장애 대응 방법을 숙지하고, 이를 통해 문제점과 자동화 가능성을 검토하는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스스로 찾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문제가 있다고 제보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문제가 생겼는지 분석하고 공유하면 팀원 간 신뢰도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것이 장애로 등록되지 않은 사소한 에러 알림에 대해서도 말이다.

출처: pinterest
이런 부분들이 조금만 더 개선되었다면, 내가 회사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검 4 : 앞으로의 계획
퇴사를 결심한 뒤, 여러 회사들의 제안을 받았다. 연봉 인상폭이 파격적인 곳,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타이틀을 약속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어디서 얼마나 버느냐’보다, 어떤 문화 안에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돈만 생각하면 연봉 인상률에 연연하는 것보다 투자를 하는게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도 든다. 사용자에게 명확한 가치를 전하고, 수많은 트래픽 속에서 진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서비스 회사.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주도적으로, 조금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했다. 물론 새로운 회사에서 나의 역량을 증명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바람이 있다. 굴러온 돌처럼 겉돌지 않고,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돌처럼 팀의 중심에 서는 것.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리잡고 싶다.
이번 이직에서 사용하는 기술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 회사가 자체 클라우드를 운영했다면, 새 회사는 외부 클라우드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다. 내가 익숙했던 환경보다는 더 보편적이고 확장 가능한 기술 스택이 기다리고 있다. 익숙함을 내려놓고, 낯설지만 의미 있는 것을 배워가야 할 것이다. 배움은 언제나 나를 다시 뜨겁게 만든다. 그 안에서 나는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의 방향성과 나의 성장 곡선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혼자 앞서가다 지치는 것보다, 서로의 시야와 속도를 조율하며 함께 나아가는 팀의 일원이 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또박또박 전달하고, 회사가 원하는 바를 똑바로 이해하며, 서로의 Why를 맞춰가는 과정 속에서 진짜 팀워크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번에도 나는 경주마처럼 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누가 씌운 차안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속도와 리듬으로 달릴 것이다. 마라톤처럼 긴 호흡을 유지하고, 중간중간 스스로 숨을 고르며, 지치지 않는 근력을 쌓아가고 싶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바쁘다’는 말로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기술적인 경험은 물론, 개발자로서의 삶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통찰들을 기록하고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내게 있어 배움의 두 번째 순환이다. 익힌 것을 정리하고, 문장으로 다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다시 성장한다. 말로만 전해지던 히스토리를 기록하고,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문서화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싶다. 개발자 개인의 성장을 넘어, 팀과 조직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 이제는 그 역할을 내가 해낼 차례다.
에필로그
“회사는 다 똑같아.” “나가봐야 고생이야.” “지금 있는 데가 제일 좋아.” “가만히만 있어도 돈 잘 나오고 복지도 좋은데, 왜 굳이?” “유토피아는 없어. 그냥 스테이. 스테이. 스테이.”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고, 어쩌면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다르다. 사는 곳도, 생김새도, 성격도, 심지어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결도 모두 다르다. 중요한 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반드시 옳은 선택이 되도록 방향을 조정해 나갈 것이다. 아직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유토피아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할 시기라고 믿는다. 누군가 만들어준 울타리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내가 좋은 환경을 만들고 함께할 사람들과 그 안에서 성장하고 싶다.
출처: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
예전부터 ‘왜 일을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참 많이 던졌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회사와 나는 서로를 필요로 해야 한다. 그 안에서 나의 영향력을 발휘해, 결국엔 사용자에게 좋은 가치를 전하고 싶다. 일은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을 바꾸기로 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곳으로 옮기고, 그 안에서 수동적인 구성원이 아닌 주체적인 사람으로 변화하고 싶다. 주어진 일만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하고 흐름을 만들어가는 사람. ‘굴러온 돌’이 아니라, 단단히 자리 잡은 주춧돌이 되고 싶다.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래, 맞는 말일 수 있다. 그치만 나는 믿는다. “나 하나 바뀌면, 적어도 내가 서 있는 세상은 분명 달라진다.”
같은 생수병도 편의점에 있을 때와 산 꼭대기에 있을 때 그 값이 다르다. 같은 사람이 서빙을 해도 동네 식당과 5성급 호텔에서는 임금이 다르다. 결국 ‘무엇을 하느냐’만큼 중요한 건 ‘어디서 하느냐’이다.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경험과 역량이 더 잘 평가받는 무대를 찾으려 한다. 더 많은 책임과 기대가 따르더라도, 그만큼 나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 이제는 나를 ‘천 원짜리 물’로 보는 곳이 아니라, 갈증을 해결해주는 ‘절박한 순간의 생명수’처럼 바라봐주는 곳으로 향한다.
이직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질문 하나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편안한가? 행복한가?” 나는 과연 편안했을까? 혹은, 행복했을까? 명확히 답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건 나는 그동안 편안함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익숙한 기술, 익숙한 업무, 익숙한 사람들, 그리고 집과 가까운 거리. 말도 안 되는 복지와 안정적인 구조 속에서 나는 조금씩 관성에 젖어 있었다. 그 관성이 점점 나를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반면, 새로 가는 곳은 분명 낯설고 불편할 것이다.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불편함과 낯섦이야말로 나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해줄 동기부여가 될 거라 믿는다. 변화는 늘 어렵지만, 변화야말로 성장의 씨앗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네이버에서의 12년. 진심으로 고마웠다.